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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보는보육운동사

사진으로 보는 보육운동사
70년대 경제성장의 그늘, 거기에 여성노동자들이 있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증가하던 그 시절, 그러나 자아실현이니 사회활동이니 하는 포장은 그녀들에겐 사치였다. 먹고 살기 위해 일터로 나가야 했던 이들 여성노동자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저임금에 시달리고 더욱이 출산, 육아라는 또 다른 짐까지 져야했다.
이른 아침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고 출근 준비를 하면서 아이들을 따로 돌봐 줄 사람이 없어 긴 하루해를 보낼 먹을거리 장만해 놓고, 행여 길거리로 나가면 유괴 되지 않을까 사고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문을 꼭 잠그고 일터로 향했던 여성 노동자들.
그렇게 남겨진 아이들을 위해 탁아소 운동이 시작되었다.


80년대 공단과 빈곤지역에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탁아소들은
가난한 아이들도, 노동자의 자식들도
건강하게, 즐겁게, 생활하고 배울 권리가 있다는 신념으로 뭉친
탁아활동가들의 열정의 산물이었다.
그것이 보육운동의 시작이다.



아이를 키우는데 너나 없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준 초창기 보육운동은 탁아소에서 아이를 돌보는 보육교사와 아이를 맡기는 여성노동자가 모두 한마음으로 만나는 "어머니 큰 잔치"를 개최하고 부모회를 운영하고, 지역공동체를 위한 사업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엄마에게 일할권리를
아이들에게 보호교육받을 권리를








이윽고 아이들에게 좀더 나은 환경과 교육을 제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탁아법 제정 운동과 육아의 사회화, 정부의 예산 지원 등을 요구하며
부모들과 함께 투쟁이 시작되었다.





1987년 제1회 공개세미나"왜 탁아소가 필요한가?"









1988년 - '올바른 탁아제도 수립을 위한 공청회'









1989년에는 탁아입법공동대책위원회 결성하고 탁아입법 공청회를 개최하였다. 또 탁아입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탁아시설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안)'을 국회에 청원하였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3당 통합과 정치관련의제로 본회 상정이 좌절되었고
정부는 '어린이보육의 1차적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는 이유로 탁아입법 제정을 반대하였다.






1990년 집에서 혼자 지내던 아이들이 사고로 잇달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에 탁아문제특별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혜영이, 용철이 남매의 위령제 이후 1990년 '아동복지법시행령거부 및 올바른 탁아법 제정을 위한 가두서명대회'








1990년 '조속한 탁아법 제정 및 민간 탁아소에 대한 지원 촉구'를 요구하는 어머니 대회가 개최되었다.








드디어 12월 18일 영유아보육법이 국회를 통과하였으나 비용의 부모 부담 원칙 등 보육의 공공성 확보와는 거리가 있는 반쪽짜리 법이었다.

이에 따라





1991년 - 영유아보육법 개정특별위원회를 결성하고 법개정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시민과 함께하는 공개 토론회,









부모들과 함께 진행한 거리서명전









1992년 - 올바른 탁아정책 실현을 위한 요구대회









1993년 - '영유아보육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









1993년 '보육사업 발전을 위한 대토론회'









1994년 - '지방자치시대의 보육사업발전을 위한 정책토론회'
'고용평등법 및 영유아보육법 개정에 관한 입장' 기자간담회등 지속적인 법 개정 운동이 진행되었다.







반쪽짜리지만 영유아보육법 제정이후 수많은 어린이집이 만들어지고 보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갈수록 높아갔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한 시설공급을 늘이기 위해 정부는 민간시설 확대를 중심으로 하는 보육시설 확충 3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정부의 민간자본 유치는 1년에 천개이상 어린이집이 신규로 만들어지는 효과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국공립 시설의 비율은 갈수록 떨어졌다.








시설 기준 완화로 늘어난 보육시설은 제대로 된 보육을 하기 어려웠고
보육의 질 문제가 주요과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또 보육에 대한 정부지원의 확대를 요구하는 운동도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보육의 질은 보육교사의 질을 넘을 수 없다!
1997년 7월27일 한국보육교사회 창립대회








보육의 질 향상과 정부지원 확대를 요구하는 운동은 보육교사회 창립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1998년 - '바람직한 유아교육체제 마련을 위한 토론회'







1998년 - '어린이 권리의 관점에서 본 보육제도 개선을 위한 세미나'









1999년 - '차등보육료 도입을 위한 영유아보육법 개정에 관한 공청회'등
주로 정책 제안과 여론 작업을 통해 정부를 압박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IMF 가 터지면서
융자를 받아 운영하던 많은 어린이집이 도산하고,
보육료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나와 다시 거리로 떠돌고
정원 감소로 인해 보육교사들은 정리해고와 임금 삭감이라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또 시설들은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 정원초과, 부실 급식 등 문제를 나타냈고, 비리 어린이집에 대한 고발과 성토가 이어졌다.








이에 1999년, 한국보육교사회에서는 현장 보육교사로 구성된 교사정책단을 구성하고 아이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였던 보육교사의 눈으로 보육의 문제를 분석하고 논의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보육교사가 바로 서야 보육이 바로 설 수 있다는 믿음과 보육은 부모와 보육교사, 지역사회가 함께 이루는 공동체를 통해 제대로 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보육교사를 위한 다양한 재교육과 바람직한 보육모형을 개발하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인권, 양성평등, 평화, 전통문화, 자연물 놀이감, 장애통합...
이러한 교육들은 해가 거듭되면서 조금씩 호응을 얻어갔고 어린이집 아동의 건강관리 프로그램 개발 및 저소득 아동 건강지원, 자원봉사활용 프로그램, 지역사회 연계, 포괄적 보육을 위한 워크샵 등 보육의 다양한 과제가 발굴되었다.




그러나 보육의 최 일선을 담당하는 보육교사의 근무환경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2002년 정부의 보육종합대책은 가정보육모제 도입, 보육료 규제 완화 등 보육의 질 하락과 공공성 훼손이 우려되는 내용으로 발표되었다.







이에 보육교사들은 토론회와 거리 서명전 등을 통해 보육료 자율화 반대, 보육교사 처우개선, 국공립시설 확충, 보육예산 두 배로 올리기 등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며 대중 운동을 진행하였다.






일명 1.17 쇼크로 불리는 출산율의 급감은 보육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였고 언론과 정치권은 보육문제에 예전과는 다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관심의 어느 부분에도 20여년 현장을 지켜온 보육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은 포함되지 못하였다.








이제 보육교사 대중이 스스로 자신들의 자주적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오랫동안 안으로 곪아들어 이제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온갖 시설 비리, 횡령, 부실한 급간식 등 보육시설내부의 문제에 대해 보육교사들이 의연히 일어나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보육교사들이 해고의 위협을 무릅쓰고 시설장과 싸우고,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보육운동은 누가 대신 하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보육교사로부터 시작된다는 의식과 자각이 보육교사 내부로부터 자라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일이 더 이상 의미 없는 희생이 아니라 당당한 노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보육노동자의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먼저 고민을 시작한 사람부터 학습과 토론이 시작되었다.



아직은 비록 소수이지만 우리의 준비가, 노력이 보육운동의 새 길을 열어갈 희망이 되리라.








이제 여기까지 왔다. 여기가 시작이다.













보육운동의 확장과 새로운 질적 도약을 위해, 전국보육노조 건설